나의 용서는 너를 잊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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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 수난 성지 주일 이사50, 4- 7;필리 2, 6-11;루카22,14-56
나의 용서는 너를 잊는 것
옛날에 어떤 아버지가 신문에 가출한 자녀를 찾는 광고를 다음과 같이 냈습니다. “철수야, 화요일 낮 12시에 장충단 공원 앞에서 만나자. 모든 것을 용서하마. 사랑한다. 아빠로부터.” 그리고 그 아버지가 약속 장소에 나갔더니 10여명의 청소년이 기다리고 있었다고 합니다.(헤밍웨이의 단편소설 참조)
옛날에 철수라는 이름, 얼마나 흔한 이름이었습니까? 이렇게 나의 용서를 기다리고 있는 가족이 있지 않습니까?
오늘은 ‘주님 수난 성지 주일’이고, 성주간이 시작되었습니다. 이번 주간, 여느 때보다 경건하게 생활하고, 성삼일 전례에 참례하여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을 통해서 드러나는 하느님의 사랑을 보다 더 깊이 깨닫고 주님의 부활절을 기쁘고 은혜롭게 맞이해야 하겠습니다.
오늘 미사를 봉헌하면서 성지(聖枝)를 축복하였습니다. 이렇게 축성된 성지를 집에 가져가 십자고상 뒤에 꽂아 둘 텐데요, 왜, 성지를 십자고상에 꽂아 둡니까?
우리가 지금 가지고 있는 성지는 편백 나뭇가지이지만, 예수님께서 인류 구원을 위해 예루살렘으로 입성할 때, 군중들이 예수님을 환영하면서 흔들었던 나뭇가지는 올리브 나뭇가지였습니다.
이 올리브 나뭇가지로 엮어 만든 월계관을 마라톤에서 우승한 선수 머리 위에 씌워주지 않습니까? 이렇게 월계관이 승리를 나타내듯 성지는 ‘승리’를 의미합니다.
그럼, 십자가는 무엇을 의미합니까? 죽음을 의미하지 않습니까? 따라서 성지가 꽂혀 있는 십자가는, 예수님께서 죽음을 쳐 이기셨다는 뜻이고, 예수님의 부활을 의미합니다
.
형제자매 여러분, 오늘 귀가하여 가족과 함께 기도하면서 성지를 십자고상에 꽂아 놓고, 자주 십자고상을 바라보며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의 신비를 묵상해야 하겠습니다.
그럼, 예수님께서 왜, 십자가 위에서 돌아가셨습니까? 우리의 잘못을 용서하시어 죄의 사슬에서 풀어 주시고, 죽음으로부터 구원해주시기 위해서가 아닙니까? 이렇게 예수님께서 오늘 제2독서의 말씀대로 “십자가 죽음에 이르기까지 하느님께 순종하시어”,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부활하셨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의 신비입니다.
불가에는 ‘반야용선’(般若龍船)이 있습니다. 중생들이 이 세상, 고통의 바다에서 고통이 없이 바다를 건네 가게 해주는 ‘지혜의 배’가 있는데, 이 배를 ‘용이 호위하고 있다’고 합니다. 이 반야용선이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가 아니겠습니까?
그렇습니다. 십자가는 이승에서 우리를 영육간에 건강하고 행복하게 살게 해주는 지혜이고, 또한 이승에서 저승으로 안전하게 건너 가게 해주는, 하느님께서 호위해주시는 예수님의 배입니다.
따라서 형제자매 여러분, 십자가를 자주 바라보고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수도자들처럼 십자가를 몸에 지니고, 십자성호를 자주 그으면서 이렇게 생활해야 하겠습니다.
십자가를 수직으로 그을 때, 저승을 갈망하면서 하느님께 나의 모든 것을 의탁하십시오. 십자가를 수평으로 그을 때에는, 이승에서 나의 가족을 위해서 사랑의 십자가를, 또 이웃을 위해서는 정의의 십자가를 기꺼이 짊어지고 생활해야 하겠습니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마태16,24)
그러나 우리가 지금 짊어지고 있는 삶의 십자가가 얼마나 무겁습니까? 때문에 얼마나 자주 넘어지고 있습니까? 그럼에도 예수님께서 세차례나 넘어지셨지만 그때마다 일어나셨듯이 다시 일어나야 힘차게 걸어가야 하겠습니다.
14처, ‘십자가의 길’을 걷다 보면, 예수님을 수난과 죽음으로 몰고 간 사람들을 만납니다. 반대로 성모 마리아, 베로니카, 예루살렘 부인들처럼 많은 여성들이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의 길에 동참하지 않았습니까?
또 키레네 사람 시몬은 군사들의 강요에 의해 예수님의 십자가를 대신 짊어지고 갑니다. “왜 하필이면 내가 남의 십자가를 짊어져야 한단 말인가?” 이렇게 어쩔 수 없이 대신 짊어진 남의 십자가가 시몬에게 얼마나 큰 축복이 되었습니까?
따라서 시몬처럼 우리도 이웃의 십자가를 대신 짊어지고 예수님의 수난에 동참해야 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좌도와 우도 사이에 매달려 계십니다. 우도처럼 가난하고 비천한 사람을 위해서 십자가에 매달려 계십니다. 또한 좌도처럼 가난하고 비천한 사람을 무시하고 외면하고 착취하는 사람을 위해서 십자가에 매달려 계십니다.
이렇게 예수님께서는 좌우에 있는 사람들이 다 구원되기를 바라시고, 좌우 둘을 잇는 십자가에 매달려 계십니다.
따라서 우리도 예수님처럼 좌우로 편가르지 말고, 좌우를 서로 연결 짓는 신앙생활을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아버지, 저들을 용서해 주십시오. 저들은 자기들이 무슨 일을 하는지 모릅니다.”(루카23,34)
이렇게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죄를 당신의 몸에 친히 지시고 십자 나무에 달리시어, 모욕을 당하시면서도 모욕으로 갚지 않으시고 고통을 당하시면서도 위협하지 않으시고, 의롭게 심판하시는 하느님 아버지께 당신 자신을 맡기셨습니다. (1베드2, 23-24 참조)
가수 조용필이 불렀던 ‘큐(Q)’라는 노래를 간혹 흥얼거리는데, 가사에 다음과 같은 말에 있습니다. “고통의 자물쇠에 갇혀 버리던 날, 그날은 나도 술잔도 함께 울었다. 너를 용서 않으니 내가 괴로워 안되겠다. 나의 용서는 너를 잊는 것, … 사랑, 눈감으면 모르리. 사랑, 돌아서면 잊으리. 사랑, 내 오늘은 울지만 다시는 울지 않겠다.”
그렇습니다. 용서하지 않으면 고통의 자물쇠에 갇혀 나만 괴로울 뿐입니다. 따라서 형제자매 여러분, 남의 잘못을 잊고 사랑으로 눈감아 줌으로써 나의 고통의 자물쇠를 끊고 주님의 부활절을 기쁘고 은혜로이 맞이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2025. 4.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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