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청(傾聽)과 관상(觀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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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 제30주일예레 31,7-9;히브5,1-6;마르10,46ㄴ-52
경청(傾聽)과 관상(觀想)
오늘 날씨는 좀 흐리지만, 완연한 가을입니다. 가을은 나에게 무엇입니까? 나에게 “가을은 모든 잎이 꽃이 되는 두번째 봄입니다.”(알베르 카뮈) 흔히들 노년을 가을에 비유하는데, 지금 나의 삶은 아름다운 단풍으로 물들어가는 두번째 봄을 맞이하고 있습니다.
남산은 아직이지만, 설악산처럼 높은 산에는 단풍이 활짝 피웠다고 하지요? 단풍을 보면 어떤 생각이 듭니까? 나에게 단풍은 나무의 다비장(茶毘葬)입니다.
불교에서 스님이 입적하게 되면 영결식이 끝내고 시신을 불로 태우는 다비장을 하는데, 이렇게 나무도 가을이 되면 스스로 자신의 몸인 잎사귀들을 불꽃으로 태우고 있지 않습니까?
그럼, 나의 노년은 단풍처럼 아름답게 울긋불긋 타오르고 있는지? 성찰하면서 요즘 나는 이렇게 기도하고 있습니다.
“오소서, 성령님, 저의 마음과 몸을 성령으로 가득 채우시어, 저의 몸과 마음 안에 사랑의 불이 타오르게 하소서.”
지난 주간에 여성 구역반장은 속초 바다로, 연령회원은 주왕산으로, 씨니어 아카데미 학생은 대부도, 섬으로 소풍을 다녀왔는데, 좋으셨습니까? 저는 사정상 함께 하지 못했지만, 대신 인도의 성자 까비르(Kabir Das, 1440-1518)의 시를 읊조리면서 생활하였는데, 그 시를 한번 감상해보겠습니까?
“꽃을 보러 정원으로 가지 마라 / 그대 몸 안에 꽃이 만발한 정원이 있다 / 거기 연꽃 한 송이가 수천 개의 꽃잎을 안고 있다 / 그 수천 개의 꽃 잎 위에 앉으라 / 수천 개의 그 꽃잎 위에 앉아서 / 정원 안팎으로 가득 피어 있는 아름다움을 보라”
그렇습니다. 나의 몸과 마음 안에 특별히 성령의 아홉 개의 꽃이 있습니다. “사랑, 기쁨, 평화, 인내, 선의, 호의, 성실, 온유, 절제”(갈라 5,22)의 꽃이 아름답게 피고 있지 않습니까?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너희의 눈은 볼 수 있으니 행복하고, 너희의 귀는 들을 수 있으니 행복하다.”(마태13,16)
이렇게 “어떠한 눈도 본 적이 없고 어떠한 귀도 들은 적이 없는 것들을 하느님께서 당신을 사랑하는 이들을 위하여 마련해 주셨습니다.”(1코린 2, 9)
그렇습니다. “만물의 아버지 하느님은 만물 위에, 만물을 통하여, 만물 안에 계십니다.”(에페 4,6)
이렇듯 하느님께서는 자연을 통해서 당신 자신을 계시하고 계십니다. 그래서 나는 아침에 파란 하늘과 흰 구름, 햇빛을 받아 반짝이는 단풍을 쳐다보면서 하느님을 뵙습니다. 오후 산책하면서 숲 속의 나무와 꽃을 보며 하느님을 뵙습니다. 밤에는 달과 별을 쳐다보면서 하느님을 뵙습니다.
또한 하느님께서는 자연을 통해서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래서 나는 숲 속에서 지저귀는 새소리, 계곡의 물소리, 산골짝에서 불어오는 바람 소리를 통해서 하느님의 말씀을 듣습니다.
일상생활 속에서 나는 양심을 통해 하느님의 말씀을 듣습니다. 가족과 이웃의 충고를 통해서 하느님의 말씀을 듣습니다. 뉴스에서 회자되고 있는 사회적 약자의 외침을 통해서 하느님의 말씀을 듣습니다.
또한 생활 속에서 나는 나의 얼굴과 가족의 얼굴을 통해 하느님을 뵙습니다. 나의 이웃과 택배 기사의 모습을 통해서 하느님을 뵙습니다. 거리에서 만나게 되는 노약자와 파지를 정리하는 사람을 보면서 하느님을 뵙습니다.
이렇게 나의 신앙은 보는, 관상(觀想)이고, 또한 나의 신앙은 듣는, 경청(傾聽)입니다. (로마 10,17)
오늘 미사를 봉헌하면서 말씀의 전례를 통해 나는 그리스도께서 들려주시는 말씀에 귀 기울여 경청하고 있습니다. 또 성찬의 전례를 통해서 내가 봉헌하는 빵과 포도주가 어떻게 그리스도의 몸과 피로 거룩하게 변모되는 지, 그 광경을 눈 여겨 관상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나의 미사 참례는 경청이고 관상입니다.
그럼에도 “마음이 무디어 나의 귀를 막고 나의 눈을 감고 있기 때문에 듣고 또 들어도 깨닫지 못하고, 보고 또 보아도 알아 보지 못하고”(마태13,14-15 참조) 있을 때가 얼마나 많은 지 성찰해봅니다.
“보라, 내가 문 앞에 서서 문을 두드리고 있다. 누구든지 내 목소리를 듣고 문을 열면, 나는 그의 집에 들어가 그와 함께 먹고 그 사람도 나와 함께 먹을 것이다.”(묵시 3,20)
이렇게 생활 속에서 나의 마음을 두드리고 계시는 하느님의 말씀을 나는 귀를 활짝 열고 귀담아 듣고자 애쓰고 있습니다.
“행복하여라,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을 볼 것이다.”(마태 5,8)
그래서 생활 속에서 나의 마음을 정화하여 혜안(慧眼), 지혜로운 안목과 식견으로 하느님을 뵐 수 있도록 노력하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길가에 앉아 구걸하고 있던, 눈먼 사람이 “다윗의 자손 예수님,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하고 부르짖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물으셨습니다.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해 주기를 바라느냐?”
그 눈먼 사람이 “스승님, 제가 다시 볼 수 있게 해 주십시오.” 하였고, 예수님께서 그에게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하고 이르시니, 그가 곧 다시 보게 되지 않았습니까?
그래서 나는 그 눈먼 사람처럼 이렇게 간청하고 있습니다.
“주님, 저의 눈을 밝게 하시어 씨앗에서 나무를, 알에서 새를, 고치에서 나비를 볼 수 있게 하소서. 모든 피조물 너머 당신을 볼 때까지 그렇게 저를 가르치소서.”(영국 시인, 크리스티나 로세티, 1830-1894)
잠시 기도하겠습니다.
“‘보라, 내가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저희와 함께 있겠다.’(마태28,20)고 말씀하신 주님, 아버지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피조물을 통하여 하느님의 사랑을 볼 수 있도록 저희의 눈을 맑게 하소서. 이 세상의 피조물을 통하여 하느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도록 저희의 귀를 열어 주소서. 아멘.” (2024.10.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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