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스카, 무슨 뜻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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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 만찬 성 목요일
탈출12, 1- 8.11-14;1코린11,23-26;요한13, 1-15
파스카, 무슨 뜻입니까?
형제자매 여러분, 성삼일 첫날, 우리는 성 목요일 주님 만찬 미사를 봉헌하고 있는데, 예수님께서 오늘 성체성사를 제정해주지 않으셨습니까?
예수님께서는 무교절을 지내시기 위해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셨고, 무교절 첫날, 오늘 제자들과 함께 파스카 음식을 드셨습니다. 이렇게 만찬을, 빵과 포도주를 드시면서 오늘 제2독서의 말씀대로, 당신의 몸과 피를 나눠 주심으로써 성체성사를 제정해 주셨습니다.
그렇다면 왜, 예수님께서 무교절 첫날, 파스카 축제, 곧 과월절을 지내시면서 성체성사를 제정하신 것입니까? 성체성사와 파스카 축제는 어떤 연관성이 있는 것이 아닐까요?
파스카 축제, 과월절(過越節)에 대해서 알아봐야 하겠습니다.
파스카, 요즘 기도 중에 자주 듣는 말인데, 파스카, 무슨 뜻입니까? 파스카(Pascha)는 영어로 ‘pass over’, 한자로는 ‘과월(過越)’인데, ‘거르고 지나간다’는 뜻으로, 이스라엘 백성의 ‘출애급(出埃及)’ 사건에서 유래한 말이 아닙니까?
하느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이집트에서 탈출시키기 위해서 열 가지 재앙을 내리셨습니다. 그 마지막 재앙이 오늘 제1독서에서 알 수 있듯이, “이집트 땅의 맏아들과 맏배를 모조리 치시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느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이 숫양이나 숫염소의 피를 문설주에 바른 집은 보고서 거르고 지나가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렇게 말씀하신 대로, 하느님께서 이집트 땅의 맏아들과 맏배를 모조리치시자, 이집트의 왕 파라오는 이스라엘 백성으로 하여금 이집트에서 떠나라고 허락하였고, 이로써 이스라엘 백성은 이집트의 종살이에서 탈출, 해방되지 않았습니까?
이 역사적인 출애급 사건을 기념하기 위해서 이스라엘 백성은 유다인의 ‘니산 달’ 14일이 되면 각 가정에서 일 년 된 흠 없는 숫양과 숫염소를 잡았습니다. 그리고 그 피를 문설주에 바르고, 고기는 불에 구워, 누룩 없는 빵과 쓴 나물을 곁들여 먹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과월절에 지냈던 파스카 축제입니다.
이렇게 어린양을 죽여 그 피를 문설주에 바름으로써 이스라엘 백성이 이집트에 내린 재앙을 피하고 이집트에서 탈출하고 해방되었듯이 예수님께서 마지막 만찬을 드시면서 당신의 몸과 피를 내어놓으심으로써 인류를 죄와 죽음에서 탈출, 해방시켜 주셨습니다. 이것이 성체성사입니다.
인류 구원을 위해서 과월절의 어린양처럼 속죄의 제물이 되신 예수님의 고귀한 사랑을, 성 토마스 아퀴나스는 독사에 물려 죽어가는 자기 새끼를 살리기 위해 자신의 피를 아낌없이 나눠주는 펠리칸에 비유하여 이렇게 찬미의 노래를 불렀습니다.
“사랑 깊은 펠리칸, 주 예수님, 더러운 저, 당신 피로 씻어 주소서. 그 한 방울 만으로도 온 세상을 모든 죄악에서 구해내시리이다.”
이렇게 아버지를 저버리고 가출한 작은 아들, 간음하다 현장에서 붙잡힌 여인, 사형에 처해 마땅했던 죄인들을 용서하시고 죄악에서 구원하셨듯이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고 우리를 죄악에서 구원하시기 위해서 당신의 몸과 피를 내어놓으신 예수님의 사랑, 이것이 바로 성체성사의 의미입니다.
“너희는 나를 기억하여 이를 행하여라.”
따라서 형제자매 여러분, 매일 성체성사, 미사 성제를 봉헌하면서 우리가 인류 구원을 위해 희생, 헌신하신 예수님의 사랑을 기억하고, 예수님처럼 가족과 이웃의 구원을 위해서 헌신하고 봉사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옛날 고려 인종 때, 가난했던 그 시절에 강원도 동천에 사는 어떤 아들이 어느 날 병든 노모를 고려장을 시키기로 작정하고, 해가 질 무렵에 어머니를 지게에 짊어지고 깊은 산 속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그 어머니는 아들의 등 뒤 지게에 실려 가면서 나뭇가지를 꺾어 가는 길마다 던지는 것이 아닙니까?
그러자 아들이 귀찮은 듯이 ‘왜 그러느냐’고 묻자, 어머니가 이렇게 대답하는 것이 아닙니까? “산은 깊고 날은 저물어 가는데 네가 혼자서 돌아가는 길에 행여 길을 잃어 고생할까 봐 나뭇가지로 길을 표시해 놓고 있는 거란다.”
그 어머니처럼 예수님께서 당신 자신을 곧 배반하고 저버리고 도망갈 제자들과 함께 마지막 만찬을 마치신 후 제자들의 발을 정성껏 씻어 주셨습니다. 제자들의 부족함을 감싸주시고 그들의 허물을 덮어 주시기 위해서가 아니었습니까?
그런데 왜,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이토록 마지막까지 애틋하게 사랑하신 것입니까?
그렇습니다. 예수님의 말씀대로 “주님이며 스승인 내가 너희 발을 씻었으면,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주어야 한다. 내가 너희에게 한 것처럼 너희도 하라고, 내가 본을 보여 준 것”이 아니겠습니까?
“서로 사랑하여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요한 13,34)
예전에 노인 부부들이 낱말을 설명하고 맞히는 TV프로그램가 있었는데, 어떤 할아버지가 글자판에 적힌 ‘천생연분’이라는 낱말을 보고서 미소를 지으며 할머니에게 말했습니다. “여보, 우리 같은 사이를 뭐하고 하지?” 그러자 할머니가 단호하게 “웬수”라고 대답했습니다. 당황한 할아버지가 손가락 넷을 펴 보이면서 “아니, 아니, 네 글자로 뭐라고 하지?”라고 하자, 그 할머니가 더욱 자신 있게 뭐라 대답했을 까요? “평생웬수”
이렇게 부부 사이가 평생웬수가 될지, 아니면 천생연분이 될지는 우리가 배우자를 대하는 태도에 달려 있지 않겠습니까?
프란치스코 교황님이 신혼 부부들에게 조언하신 다음과 같은 말씀이 생각납니다.
“다투세요. 필요하다면 접시 한두 개 깨치는 것도 괜찮습니다.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하지만 두 가지만 꼭 지켜 주세요. 절대로 아이들 앞에서 다투지 말 것, 반드시 그날 안에 화해할 것, 다음날까지 이어지는 냉전이야말로 가장 위험한 일이니까요.”
어느 부부는 매년 성 목요일 저녁에 자녀들과 함께 식사를 하고 서로의 발을 씻어준다고 합니다. 이렇게 가족의 발을 씻어주면서 서로의 허물과 잘못을 씻어주고, 서로 화해하면서 사랑을 돈독히 하고 존중할 것을 서로 다짐한다고 합니다.
어느 쌍둥이 형제가 있었는데, 성장해 형은 알코올 중독자가 되었고, 동생은 유명한 변호사가 되었습니다. 한 기자가 형에게 어떻게 알코올 중독자가 되었는 지 물었습니다. “알코올 중독자 아버지 때문입니다. 아버지가 알코올 중독자니 자식도 그렇게 되는 게 당연한 것 아니겠습니까?”
이번에는 동생에게 어떻게 변호사가 되었는지 물었습니다. “알코올 중독자였던 아버지 덕분입니다. 아버지처럼 되고 싶지 않아서 정말 열심히 공부했습니다.”
가족이 ‘누구 때문에’ 라고 서로 탓하고 원망하기 보다는 ‘누구 덕분에’라고 서로에게 감사하면서 생활한다면 우리 가정이 보다 더 행복하고 화목해지지 않겠습니까? 가정의 행복과 불행은 나의 선택에 달려 있습니다.
따라서 가정 생활을 하면서 나는 남편과 아내로서, 부모와 자녀로서의 역할을 충실하게 하고 있는지 반성을 해보아야 하겠습니다.
또한 오늘 주님 만찬 미사를 통해서 깨달은 예수님의 사랑을 본받아 가족 상호간에 용서하고 화해하고 사랑함으로써 우리 가정을 보다 더 화목하고 행복하게 만들어가야 하겠습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성삼일, 우리 가정을 보다 더 성화시키는데 충분한 은
총의 시간입니다. 예수님께서 삼 일만에 당신의 수난과 죽음에서 부활하지 않으셨습니까? (2025. 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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